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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일본의 철포를 다룰 때, 운용방식을 먼저 다루고, 
그 영향을 나중에 다루는게 순서가 맞아보일 수 있습니다만,
차라리 그 영향을 먼저 다루면,
운용방식이 더 익숙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하여,
철포의 영향부터 글을 쓰겠습니다.
기병이나 대포를 다룰때 보다는 재미없는 글이지만,
기병이나 대포와 다르게, 철포에 관한 내용은 어느정도 다른 지역과 통용되는 얘기들도 있으니,
일본 전쟁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어느정도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철포로 인한 높아진 사상율


철포가 도입된 이후, 전국시대에서는
'원거리에서 다수의 인간을 살상 가능' 하게 되었습니다.

수천명의 철포병을 일순간에 집중시켜,
적의 진형중 일부를 붕괴시키기도 했고,

인간의 근력에 의존하던 활이
전투가 경과함에 따라, 힘이 부치는 반면,
철포는 그 강력함을 지속적으로 발휘했습니다.


image.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활이 총보다 사거리가 길다느니,
먼거리에서는 더 정확도가 높다느니 하는 얘기들은,
오른손, 어깨, 왼팔이 변형될 정도로 훈련한 소수 궁병들의 얘기다.
대다수의 궁병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이며,
결과적으로 봐도, 총이 활을 대체했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철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는
평균적인 사상율은 27%였습니다.

하지만 철포의 본격적인 도입후에는,
평균적인 율이 39%로 올랐습니다.

당시에는
전사율이 3%, 사상율이 9%만 되어도,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철군해야할 정도니,
10%넘게 치솟은 사상율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아마고군.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아마고의 미마사카 원정당시,
아마고군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8000명 중에 사상자가 2000명 (7%) 이 되어,
작전을 중단하고,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철포로 인한 야전의 결정력 상승


허구의 백병주의.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흔히 알고 있는 이 장면에서와 같이,
활이 총보다 큰 영향을 끼친 것만 같지만,
이 것은 100년이 넘는 전국시대를 모두 통틀은 것으로,
철포 도입 후만 한정한다면,
철포의 영향력은 활을 상회합니다.


철포가 보급되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도,
철포는 바로 그 영향력을 드러내었습니다.

예를 들면,
철포병 150명을 포함한 200명의 아마고군이
철포를 방심하며 다가오던 500명의 모리군과 맞붙어,
전사자 112명을 안기며, 모리군을 철퇴시켰습니다.

총포 아시가루.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이 전투에서 아마고군은
승기를 잡았음에도, 적에게 철포를 계속 쏘아야할지
붕괴된 적을 향해 돌격해야할지 몰랐다고 한다.
철포가 도입된지 얼마 안되어,
사용하는 측에서도 전과를 확대하는 방책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오오토모군이 치쿠고를 침공할 당시,
적들이 매복해있을 법한 곳에, 철포를 쏘아댔더니,
매복해있던 적들이 놀라서 달아나,
이를 추격해 500명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도입 초기에는 철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철포에 익숙치 않은 적들에게 대량의 철포를 발사하면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예가 많았습니다.


탄금대.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전쟁 전에 조총의 존재를 알았던 것과 관계없이,
임진왜란 초기, 조선이 조총에 크게 당했던 것은
'조총이 강력한 무기' 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총이 잘 모르는 무기' 였던 점 또한 크다




또한 철포가 활발히 보급된 뒤에는,
철포를 사용하는 방법이 능숙해져,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철포를 집중시켜 적 진형을 붕괴시킨 뒤,
그 속으로 돌격하여 백병전에 돌입하거나, 적들을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시켰습니다.



갑양군감
"철포의 보급으로 많은 수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검록
"노부나가 시기에 이르러 철포가 전투에 활발히 이용되고,
전투가 치열해졌다."

"철포로 인해 군의 모습도 바뀌게 되었으며,
전투가 한층 심해졌다." 


장택문서
"수급을 얻은 경우를 보면, 
총격으로 크게 부상을 입어 걸을 수 없는 자로 부터 얻은 것이
열에 아홉으로 보인다. "

등등 당시의 전투를 묘사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지역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구가 한정적인 시대에
패배측의 사상율 증가는,
패배측의 괴멸 혹은 군사적 궁핍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반대로 말하면, 야전에서 승리하는 것의 이득
이전의 그 어떤 때보다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시즈카타케 전투.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대표적으로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괴멸적인 패배를 당한 가쓰이에는
붕괴된 잔병을 거느리고, 성으로 돌아가 자결하였다.



사실 이러한 내용은 그다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대중적으로 알고있는 서양의 전쟁사에서의 총포는
이렇게까지 패배측 세력 자체의 괴멸을 안기지는 않았으니까요.




전과의 확대가 부족했던 유


소화기의 발전 이후, 야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진 유럽에서는,
야전의 승리가 반드시 전략적인 승리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512년 이탈리아 전쟁중,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교황*스페인 연합군을 괴멸시켰지만,
프랑스군은 효과적으로 추격을 할 수 없었고,
교황*스페인 연합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
승리한 프랑스군이 전리품의 약탈에 몰두했다는 점이 컸습니다.


교황*신성로마제국*스페인 연합군과 베네치아군이 싸운
브레시아 전투에서는
연합군 측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보상을 끝내지 않은 병사들을 새로운 작전에 투입할 수 없다' 며 
승리를 확대하는 전과확대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머스켓티어.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물론 서양에서도 총포의 도입후 사상율은 크게 높아졌다.
비록 미디블 토탈워의 화승총은 영 좋지 않지만...

당시 군의 주체였던 용병은
전투 전에 지급되는 급여와, 전투 후의 약탈
전투 참가의 동기가 되었으며,
전투 승리후 적군에 대한 추격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용병들은 전쟁 자체가 밥줄이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적들을 괴멸시켜, 전쟁을 빨리 끝낼 동기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일본 띄우려고, 유럽 까는거 아니냐고?
당시의 마키아벨리 같은 이들이
괜히 용병에 대해서 피를 토하며 깐게 아니다.




또한 패배측이 큰 피해를 입더라도, 
패배측의 지휘관은 잡히더라도, 몸값을 지불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사령부가 온존하여, 차후 작전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군 수뇌부를 괴멸시키기 어려웠습니다.

라벤나 전투.PNG 일본의 철포 - 야전에서의 영향
앞서 예시로 든 라벤나 전투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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