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버햄튼이 7,000번째 골을 넣은 첫 번째 팀이 되었을 때, 그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낸 선수는 누구였을까요?
존 리차즈? 흐음... 스티브 불? 물론 그 역시 대단하죠! 케니 밀러? 실뱅 이뱅크스 블레이크? 라울 히메네스? 꽤 최근까지 봤던 얼굴들이군요.
근데 사실 위의 선수들은 관련이 없답니다.
설기현이 15년 전 셀허스트 공원에서 했던 것처럼, 한국의 유명 선수 설기현의 그 날의 기록을 따라가 봅시다. 그 골은 윙어의 광범위한 활동량으로 가져온 골은 아니었습니다. 크로스에 가까웠던 슛이 니어 포스트로 살포시 들어갔습니다. 허나 울버햄튼은 나중에 안드레 존슨의 동점골로 인해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챔피언 결정전은 1대 1로 끝나고 말았죠.
그렇다고 한들, 설기현이 느끼는 열정과 즐거움운 전혀 흐려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골을 넣고 울버햄튼의 긴 클럽 역사에 기록된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설기현은 그 때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팬들이 있기에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이 사근사근한 인상의 공격수가 유럽 전역의 다양한 클럽에서 이루어낸 유일한 목표가 이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안더를레흐트에서 뛴 유일한 챔스에서 득점한 한국인이었고, 모든 이들의 뇌리에 박힌 2002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극적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결국 대한민국 대표팀을 영웅으로 만들어냈죠. 팰리스에서의 역사적인 골이 있기 한 달 전에도, 그들의 홈구장 몰리뉴 스타디움에서 노리치를 상대로 골대에 맞고 튕겨나간 그의 드릴같은 슈팅은 울버햄튼 올해의 골이 될 수도 있었답니다.
그야말로 큰일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죠!
한일월드컵이 아시아 축구의 수준이 어떠한가로 모든 축구 팬들을 상상에 빠지게 했을 때, 이탈리아전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대한민국의 기억에 남을 준결승 진출은 최초로 4강에 진출한 아시아 팀이라는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주리에게 패배하기 직전이었던 때, 당시 스물 세 살인 설기현은 이탈리아 골키퍼 잔루이지 부펀 너머로 낮게 슛을 날렸습니다.
전설적인 해설가 배리 데이비스는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습니다.
"골입니다! 그리고 설기현! 3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한 건가요!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설기현은 이후 측면 네트를 맞추는 슛으로 골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게임을 끝낸 건 안정환이었습니다. 조용하고 침착한 선수는 한국 축구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을 이뤄냈죠.
"이 골은 국가에게도, 저에게도 중요한 골이었습니다." 설기현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제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경기였고, 저는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걸 기억해주죠.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도, 사람들은 절 보며 다시 기억해줍니다. 그 후 안더를레흐트에서 뛰는데, 월드컵 이전에는 뚜렷하게 잘 하고 있지 못했기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월드컵 후에 저는 더 좋은 경기력으로 경기를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에서 기자들이 무엇이 저를 바꿔놓았는지 물었습니다. 제가 아예 다른 선수가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월드컵은 저에게 너무 큰 경험이었고, 어쩌면 더 자신 있게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그 때 저는 더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유쾌한 반란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독일의 손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설기현은 그 여운이 끝난 뒤에도 계속 축하를 받을 수 있었죠..
왜냐하면 그의 아내는 월드컵 직후 –지금은 18살이 된- 아들을 낳았고, 설기현은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15살이 된- 이 부부의 딸은 몇 년 후에 울버햄튼의 뉴크로스 병원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화상 통화를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 설기현은 영어와 한국어를 쉽게 이해하며 아들은 필요할 때 친절하게 통역을 해 줍니다. 현재 41살인 설기현은 한국 K리그의 2부 팀인 경남 FC의 감독으로 있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첫 시즌을 험난하게 마친 뒤에 겨우 3일 뒤에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서 다시 일한다는 것은 그의 커리아거 로얄 앤트워프, 안더를레흐트에 합류하기 위해 벨기에로 가는 유럽에서의 꿈과 같은 성장을 완전히 이루어냈음을 보장합니다. 챔피언스리그의 득점 뿐 아니라 벨기에 슈퍼컵에서 12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03/04 시즌 챔피언십 메달은 획득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설기현은 이적했습니다.
프리미어리그는 한 때의 야망으로 남았지만 그는 울버햄튼에서 잠깐동안 뛰었지만 충분한 잠재력을 보여줬습니다.
"벨기에는 정말 즐거웠지만 항상 영국에서 뛰고 싶었고 울버햄튼이 저에게 이적 제안을 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라고 설기현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죠. 예. 저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싶었지만 바로 그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기에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이 제안은 울버햄튼과 같은 빅 클럽에서 뛰면서 도전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벨기에 축구와 영국 축구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 2부 리그가 엄청나게 거칠었기에 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데이브 존스가 경질되면서 존스 밑에서 익숙해질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존스의 후임으로 글렌 호들이 부임하면서, 설기현은 높은 인기를 누리는 축구 평판에 맞지 않는 기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호들과 함께 경기에 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비록 궁극적으로 프리미어리그로의 도약은 쉽지 않았다 해도 말이죠.
"데이브와 글렌은 감독으로서 매우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둘 다 그들의 감독 커리어에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라고 설기현은 설명합니다.
"저는 글렌이 영국 축구에서 그렇게 유명한 선수라는 것을 몰랐지만 동료들이 말해 주었고, 훈련하면서 글렌이 매우 재능있는 감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승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2006년 7월 초에 호들은 울버햄튼을 떠났고, 설기현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월드컵 출전을 마치고 레딩으로 이적해 프리미어리거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팀을 떠났습니다. 76경기 10골을 넣으며 쌓인 행복한 추억은 말할 것도 없었죠.
이 대기록은 FA컵 크리스탈 팰리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나왔습니다.
몰리뉴에서의 유혹과 스릴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경기장과 너무나도 많은 팬들이 있습니다" 라고 설기현은 그 때를 기억합니다. 당시 2부리그였던 팀 치고는 팬층이 두터웠습니다. 경기장에는 항상 관중들이 있었고 그들이 우리가 경기를 이기기를 얼마나 원하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팀이 져도 그 노래를 계속 연주하나요?"
맞아요, 설기현. 그들은 계속 그럽니다. 그리고 나서 독특한 버전인 'Hi Ho Wolverhampton'을 외칩니다.
"제가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것은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 말했습니다.
"울브스들을 위해 뛰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의사소통 문제가 힘들었지만 항상 라커룸에서 환영을 받았고 좋은 팀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seyi oloinjana(세이 오로핀자나)는 제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선수였고, kenny miller(케니 밀러)와 matt murray(맷 머래이), 그리고 paul Ince(폴 인스) 등 다양한 선수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울버햄튼은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언제 은행을 갔는데 회계사가 열렬한 울브스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저를 도와 일을 처리해줬고 제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정리해야 할 서류가 있었을 때마다 저는 그를 보러 갔습니다! 그 당시 팀은 승격하지 못했지만 저에게는 환상적인 2년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러한 역사를 가진 클럽인 울버햄튼에서 처음 영국을 경험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가슴을 피고 다닐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설기현을 조금 당황하게 한 울버햄프턴의 삶의 일부는 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운트 호텔에 머무르는 것을 매우 즐겼고, 어느 사이트에 그 호텔에 귀신이 나온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거 본 적도 없답니다! 마운트 호텔은 꼭 한 번 가보시길!)
설기현이 말합니다.
"제가 계약에 서명할 때 전 너무나도 아름답고 놀라운 마운트 호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환상적이었죠. 그때 어디선가 호텔에 귀신이 나온다는 글을 읽었는데,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클럽이 제 가족이 살 집을 찾기 전에 다른 호텔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마운트와 너무나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오, 무서웠어. 하지만 결국 설기현은 몰리뉴에 오래 머물 운명은 아니었고, 레딩을 거쳐 풀럼으로 이적하면서 프리미어리그를 음미하면서 즐겼습니다. 그는 특히 로얄스와의 한 시즌 동안 그곳에서도 홈구장을 바라보았으나, 결국 사우디아라비아 클럽 알 힐랄과 임대 계약을 맺은 후, 한국으로 돌아와 그의 커리어를 이어나갔습니다.
아시아의 축구 강국과 다시 한 번 재회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무려 9번 연속으로 월드컵에 진출한 나라라고요.
설기현이 울브스에 있을 때, 한국 언론들은 경기마다 그의 활약상을 연일 이야기했고, 울버햄튼의 한 가족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선수들의 호소를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회계사이자 울브스의 전 연습생 골키퍼였던 마크 플레처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프랑스와 대한민국의 경기 티켓을 얻을 수 있었고, 설기현에게 울브스 유니폼를 입겠다고 한 약속을 한 플레처는 젠트랄 경기장에서 활기찬 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그들의 이변과도 같던 2002년의 경기력을 재현할 수 없었고, 그룹 스테이지에 출전할 수 있었던 설기현은 박지성이 골로 연결시킨 기점이 되는 크로스를 전달해냈습니다.
"젠트랄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곧 내가 입고 있었던 설기현의 울버햄튼 유니폼에 대한 많은 관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플레처는 기억합니다. 설기현은 그 경기가 끝난 후에 제 가족들에게 유니폼에 메시지를 적어 줬습니다. 프랑스 사람인 제 아내가 어느새 한국 응원단과 같이 응원하고 있더라니까요 ㅋㅋ. 나중에 설기현이 프랑스를 상대로 무승부를 거두고 그들의 국기 옆에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설기현은 나라를 위해 83경기에 뛰어 20골을 기록했고, 2015년 은퇴해 감독으로써의 야망을 성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12월 경남에서 첫 수석 감독으로 부임하기 몇 년간 성균관대 코치를 지냈고 K리그1 성남FC에서 경기력향상부장으로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항상 감독이 되고 싶었고, 유럽에서 뛰는 것은 제가 다양한 새로운 스타일을 배우고 많은 감독들 밑에서 일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라고 설기현은 설명합니다.
"K리그에서는 고전적인 한국 축구 방식으로 경기를 치루지만 설기현의 목표는 유럽에서의 경험을 살려 좋은 축구를 할 수 있는 팀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클럽 차원에서 2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감독 밑의 코치로도 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경험을 바로 사용하고 싶었고, 그것이 제가 대학 팀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이유입니다. 프로 경기에 대한 부탐 없이 연습하고, 코치로서 일을 하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저는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볼 수도 있고, 그것들로부터 배워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지 못한 결과를 얻는다면, 여러분은 프로 클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고당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4년 정도 후에 프로 경기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경남 감독 취임 1주년을 앞둔 이번 시즌은 강등 후 곧바로 1부 리그 복귀를 목표로 하는 인상적인 시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종료의 방식에서 울브스들에게는 익숙한 몇몇 비통한 이야기와 느슨하게나마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몰리뉴의 열혈 팬들은 매주 느꼈던 VAR의 연관성은 전 축구계에 걸쳐 계속해서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경남은 조 3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4강전에서 경남이 대전 하나 시티즌을 상대로 1대 1로 비기면서 한 경기만 이긴다면 상위권 팀으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원과의 결승전에서 승격에 실패한 설기현의 팀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설기현이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1대 0으로 이기고, 추가 시간 4분이 흐르는 때, 승격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거의 다 왔는데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키고 페널티킥을 선언했습니다. 상황과 심판의 결정에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결국 그는 결정을 내렸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