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도란?
- 중도는 강원도 춘천시 중도동에 위치한 섬이다. 비옥한 충적지대로 과거부터 사람이 정착하여 거주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실재 발굴조사 전까지도 경작 행위가 계속 이어지던 곳이다.
2. 중도는 언제부터 주목 받기 시작했는가?
- 대중들 사이에 중도가 알려지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사실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목을 받아오던 곳이었다.
이미 197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진 지표조사를 통해 중도에 선사 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어느 정도 알려져 왔었고 또한 198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도 지속적으로 유적의 존재 유무가 확인되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도가 학계에 이어 대중들 사이에서도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현재 강원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레고랜드 사업의 영향이 크다. 레고랜드 사업과 관련하여 중도 전체에 대한 정밀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유적과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언론에서는 중도에서 발굴된 엄청난 규모의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기사를 연이어 보도하였고 이에 따라 중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게 되었다.
3. 중도가 주목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 중도가 주목 받는 이유는 단순히 대단위 규모의 복합유적이란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주거지, 대규모 저장시설, 환호, 분묘, 경작유구 등 당대 시대에 형성된 취락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어 당대 시대(특히 청동기) 연구에 필요한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청동기, 원삼국 시대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이전의 신석기, 그리고 이후의 삼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친 유구들이 발굴됨으로써 시대별 변천 과정(취락, 분묘, 중도의 용도 등)을 유추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주목 된다.
4. 중도에 대한 기존 조사 내용
1) 1980년대
- 학계가 중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두 차례(1977ㆍ1978)에 걸쳐 실시한 ‘한강유역 지표조사’때문이었다. 해당 조사에서 주거지로 추정되는 흔적과 더불어 선사 시대 유물(토기류와 석제류)들이 수습되었던 것이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해당 조사를 기반으로 1980년부터 1983년까지 3차례에 걸친 연차발굴을 진행하였으며 이를 통해 원삼국시대 주거지 2기, 청동기 시대 지석묘 2기를 발굴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2) 2000년대
- 2000년대에 들어서도 조사는 계속 이어졌다. 이때 조사(2005ㆍ2007)는 강원도의 의뢰로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하였으며 본래 중도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게 되면서 일부 구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제한적으로 진행된 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사단은 신석기 시대부터 원삼국 시대에 걸친 문화층과 생활유적, 경작유적, 지석묘 등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3) 2010년대
- 2010년대에 들어서도 조사는 계속 이어졌다. 4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제방축조구간에 대한 조사(2010~2011)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조사는 5개 조사단(한백문화재연구원, 한강문화재연구원, 강원고고문화연구원, 강원문화재연구소, 예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제방축조구간이란 일부 제한된 구역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300기에 달하는 생활유적과 분묘 유적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5. 중도에 대한 최근 조사 내용
1) 개요
- 2011년, 레고랜드 유치가 확정되면서 중도 전체에 대한 전면적 조사(2011~2012)가 필요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2개의 조사단(예맥문화재연구원,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중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전면적 조사(시굴조사)에 착수하였으며 그 결과 일부 구역을 제외한 모든 구역에서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어 정밀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새롭게 제기되게 되었다.
정밀발굴조사(2013~2017)는 7개 조사기관(한강문화재연구원, 한백문화재연구원, 예맥문화재연구원, 고려문화재연구원, 한얼문화유산연구원, 강원문화재연구소, 국토문화재연구원)이 각각 담당 구역을 분담하여 실시하였다.
정밀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유구는 약 3,100기로 청동기 시대와 원삼국 시대의 유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청동기 시대의 유구가 압도적인 비율을 보였다.
한편 정밀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약 8,000점으로 이 가운데 청동기 시대와 원삼국 시대의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유구의 양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2) 정밀발굴조사 내용 소개
* 모든 내용(유구 약 3,100기 / 유물 약 8,000점)을 다루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이 일부만을 골라, 그 중에서도 청동기 시대에 한하여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① 환호 유구
가. E1, B1 구역 환호
- 정밀발굴조사 과정에서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방형 형상의 환호가 거의 완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굴되어 주목을 받았다. 다만 환호 안쪽에서 목책이나 토루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방어의 용도보다는 구역의 구획 또는 경계의 용도로써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환호의 굴착 형태는 대체로 U자형으로 깊이 45~102cm, 폭 1~2.5m 내외로 확인되었으나 추후 유실되었을 부분을 고려하면 환호의 깊이는 최소 1.6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과 남쪽, 북서쪽에 각각 굴착되지 않은 단절구간이 확인되어 총 3개의 출입구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동쪽과 서쪽, 남쪽 구간은 방형 형상을 따라 직선의 형태를 띠고 있는 반면 북동쪽은 파도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어 다른 구간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다른 구간과 구별되는 독특한 배치형태와, 출입구가 확인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일반적인 공간으로는 활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즉 특수 공간으로 추정)된다.
환호 내에서 유물은 석기 1점만이 출토, 수습되었다.
가-1 E1 구역 129호 주거지
- 소형 주거지에 해당되는 E1 구역 129호 주거지는 내부에서 비파형 동검이 발굴되어 발굴단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환호 내 특수 공간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공간과 인접한 곳이라 더욱 더 주목을 받았다.
비파형 동검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해당 주거지는 공동체의 수장이 거주했던 공간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으나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점에서 아마도 수장보다는 제사장 또는 이와 관련된 인물의 거주공간으로 추정된다.
해당 공간은 화재에 의해 폐기된 후 자연 매몰된 것으로 보이나 내부에서 비파형 동검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제의와 관련해 의도적으로 소각되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주거지 내부에서는 비파형 동검 이외에도 토기 2점, 석기 및 금속 4점이 발굴, 수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