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차산 4보루란?
- 삼국시대 고구려가 아차산 일대에 축조한 여러 보루 가운데 하나이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한강 일대를 감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는 아차산 일대 뿐만이 아니라 인근의 용마산, 수락산, 망우산 등에도 구릉과 능선을 따라 여러 개의 보루를 축조하였다.
< 아차산 4보루를 멀리서 바라본 모습 / 출처 : 아차산 4보루 발굴조사보고서, 2009 >
2. 아차산 4보루의 구조
1) 성벽(체성과 치성)
-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2007년 발굴조사는 과거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행했던 발굴조사와 달리 성벽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그 결과 기존에 알려진 2개소의 치성 이외에 3개소의 치성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총 5개소의 치성이 있었던 것으로 새롭게 드러나게 되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파악한 성벽과 치성의 모습, 5개소의 치성이 확인 되었다. / 출처 : 아차산 4보루 발굴조사보고서, 2009 >
또한 성벽 각 구간의 축조 방식이 달랐던 것으로 드러났는데 동쪽 성벽은 잘 다듬은 석재를 교대로 맞물리면서 정교하게 축조되었던 것과 달리 반면 북쪽 성벽은 부정형 석재를 대강 다듬어 축조되었던 것으로 드러나 서로 대비 되는 모습을 보였다.
서쪽 성벽 구간에서는 다른 성벽 구간과는 달리 목책열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석축 이전에 먼저 목책으로 성벽이 세워지고 이후 증축ㆍ개축 과정에서 석축으로 변화했음을 말해준다.
성벽의 각 구간마다 정교함에 있어 각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토압에 의한 성벽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진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안은 부정형 석재와 흙을 채워 넣은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치성의 존재가 주목되는데 여기서 치는 전투 전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미리 관측하고 전투 시에는 접근하는 적을 양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쌓은 것을 말한다. 이러한 치는 그 형태, 즉 각을 이루고 있는지 아니면 둥근 형태를 이루고 있는지에 따라 전자는 치성, 후자는 곡장(또는 곡성)으로 분류되는데 아차산 4보루에 있는 치들은 그 형태가 각을 이루고 있어 치성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치성은 이미 위에서도 언급힌 바 있지만 아차산 4보루 내에서만 총 5개소가 확인되고 있으며 다만 성벽과 함께 축조된 것이 아니라 성벽의 몸체인 체성을 먼저 축조한 후 나중에 치를 잇대어 축조했거나(동벽치에 해당) 반대로 치가 먼저 축조되고 이후 체성이 축조되는(서북치에 해당) 등의 모습을 보인다.
다른 형태의 치성도 확인된다. 바로 남쪽 성벽에서 확인된 이중구조의 치성이다. 이중구조의 치성은 현재 해당 보루의 출입시설(현문식 출입구조)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으며 보루의 출입시설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고 전투 시 출입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형태로 추정 된다.
2) 내부 시설
-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1997년의 조사와 1998년의 조사는 성벽 내부 시설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성벽 내부에서 총 7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모든 건물지를 다루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질 수도 있어 일부 중요 건물지만을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다.
먼저 보루 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1호 건물지의 경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 명문이 적혀있는 접시와 함께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류, 그리고 철제 투구 1점이 거꾸로 뒤집힌 채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현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 건물지 내 온돌 아궁이 속에서 철제 투구 등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해당 보루 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거주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3호 건물지는 보루 내 가장 큰 건물지로 건물의 북쪽으로는 3기의 온돌과 2기의 저수시설, 2기의 배수시설 등으로 조밀하게 구획된 반면 남쪽으로는 의도적으로 비워 둔 넓은 공간이 나타나는데 병사들이 모이던 집합장소, 즉 강당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평면도에서 가장 왼쪽에 보이는 1호 온돌의 모습 / 출처 :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00 >
< 북쪽에서 바라 본 강당 또는 광장으로 추정되는 장소, 위의 평면도로 설명하면 가운데 2호저수시설의 오른쪽에 있는 5호 온돌을 기점으로 오른쪽을 바라 본 모습이다. / 출처 :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00 >
< 3호 건물지 내에서 발견 된 배수시설의 모습 / 출처 :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00 >
한편 간이대장간 시설로 추정되는 공간도 확인되었다. 공간 내부에서 사용 중 파손되었거나 보수한 흔적이 있는 철기류가 다량으로 출토되었고 또한 난방용이 아닌 철기의 제작 및 수리 목적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2호 온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간이대장간 시설로 추정되는 2호 온돌의 위치 / 출처 :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00 >
3. 어떻게 축조 되었는가?
- 아차산 4보루는 한 번에 축조되었던 것이 아니라 몇 차례의 증축과 개축 과정을 거쳐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 구간 별(남ㆍ동벽 구간, 북벽 구간, 서벽 구간)로 저마다 다른 축성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벽 구간에서 목책의 흔적이 확인되어 아차산 4보루는 처음부터 석축으로 축조 것이 아니라 최초 목책의 단계에서 증축과 개축의 과정을 거쳐 석축의 단계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목책의 흔적은 서벽 구간에서만 확인되었고 이외 동ㆍ북벽 구간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동ㆍ북벽 구간도 최초 목책으로 시작해 이후 석축의 단계로 나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해 볼 수도 있겠으나 현재 보루의 복원까지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목책과 석축이 처음부터 혼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강과 풍남토성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는 남ㆍ동벽 구간의 경우 그 중요성이 상당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석축을 이용해 견고하고 축조하고 반면 아군이 주둔하고 있는 용마산 보루군을 마주하고 있는 서벽 구간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져 처음부터 목책으로 축조하였라는 추정이다.
위와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아차산 4보루의 경우 초기 목책 또는 목책과 석축이 혼합된 단계에서 점차 증축과 개축의 과정을 거쳐 기존의 목책은 석축으로 대체되고 또한 치들이 새롭게 추가되며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아차산 4보루의 운영 시기
- 아차산 4보루는 대체적으로 6세기 초반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금강 유역에까지 남진하였던 고구려가 힘을 회복한 백제에 의해 한강 유역으로 밀려나게 되는 시점이다.
축조시기를 이보다 더 앞서 보는 경우도 있다. 아차산 4보루의 축조 과정이 초기 목책 단계에서 증축과 개축의 단계를 거쳐 석축 단계로 나아갔다는 점에 기반하여 한강 유역으로 밀려난 시기에는 이미 목축 단계로 축조되었던 아차산 4보루를 석축 단계로 전환하였을 뿐이라는 견해다.
그러나 실질적인 폐기는 그보다 더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영역의 변동 과정 속에서 보루를 경우에 따라 재사용하기도 하였고 이후 신라가 주를 설치한 뒤에야 완전히 폐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세세하게는 여러 의견들이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아차산 4보루는 6세기 초반에 축조되어 백제ㆍ신라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에서 물러나는 6세기 중반까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만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5. 주둔군의 규모
- 기록의 부족으로 아차산 4보루에 주둔했던 고구려군의 정확한 편제와 규모를 추정하기란 힘들다. 다만 해당 유적지에서 발굴된 건물지, 온돌 등을 통해 대략적인 추정을 해볼 수는 있다.
아차산 4보루에서는 총 7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내부에는 1기 이상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인근의 구의동 보루에 대한 1977년 발굴조사 결과 총 1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실내 면적 약 14평 규모의 온돌을 포함한 방형의 구조로 발굴된 무기류의 분석을 통해 대략 10여명 규모의 인원이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구의동 보루에 대한 분석결과를 비추어 보면 아차산 4보루에 주둔했던 고구려 군의 규모는 각각 10여명으로 구성된 10개의 부대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차산 4보루에서 발굴된 무기류의 양이 보루의 규모에 비하면 적게 발견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해당 보루에서 고구려 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무기와 장비들을 수습해 철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6. 보루에서 발굴된 유물들
- 총 3차례에 걸쳐 아차산 4보루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서울대학교 박물관(1997년과 1998년)과 국립문화재연구소(2007년)의 발굴조사 결과, 아차산 4보루에서는 총 661점(1997년과 1998년 538점, 2007년 123점)의 토기와 340점(1997년과 1998년 319점, 2007년 21점)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1998년 발굴의 경우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많은 고구려 토기가 출토된 것이어서 이는 향후 진행된 고구려 토기 연구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먼저 토기의 경우 기능상 저장용, 운반용, 조리용, 배식용 등 그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했을 뿐더러 대부분이 실생활용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또한 일부에서는 명문이 새겨진 것도 있었는데 이는 유적의 성격과 시기 추정에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